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2



 

박민규씨의 단편 소설은 가끔 여러 소설집에서 접했는데, 일상언어를 자유자재로 문학적인 언어로 소화하는 재능이 탁월하다고 느꼈다. 비참하고 절망적인 타인의 일상을 한 순간에 자신만의 언어로, 독자의 것으로 체화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의 문장력을 보면서, 아 정말 아무나 작가를 하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깨달음도 얻었을 지경

 

재기발랄하고 유쾌한 문체는 성석제 선생님의 소설에서도 익히 찾아볼 수 있었는데(정말로 낄낄대며 읽었던 소설은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이다. 진정 강추함 대학교 도서관에서는 무리없이 구해서 읽을 수 있을 듯. 이 단편이 있는 소설집이 절판이 됐나, 암튼 그렇다), 그의 몇 년 전 작품에서는 유머는 사라지고 처절한 일상만이 남아서 읽다가 괴로울 정도였다. 그 후로 다시는 읽어보지 않았고.

 

박민규 소설의 특유의 유머와 그 속에 담긴 애잔한 감정을 잘 느낄 수 있는 소설이 바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이다(‘가장이라는 말을 넣을 수 없는 까닭은 내가 그의 장편 소설을 다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 소설의 줄거리를 말하자면, 약간 핸섬한 청년과 꽤나 아름답지 않은 여인의 사랑이야기이다. 1980년대 중 후반에 몰아 닥친 천민 자본주의와 외모 지상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중에(뭐 그렇지 않은 시절이 어디 있었겠느냐만은), 19세만이 경험할 수 있는 소박하고 진실된, 슬프지만 그래서 찬란하게 남을 수 밖에 없었던 누군가의 사랑에 대한 기록이다.

 

지갑이 가벼울수록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인간이구나, 늘어선 가로수를 바라보며 나는 베트남의 농부처럼 고개를 끄덕였었다. 늦겠어요,라고 그녀가 속삭였다. 아니, 속삭인 건 아니지만 늘 고개를 숙인 채여서 속삭인다는 기분이 들곤 했었다. 나는 말없이 쇼핑백을 챙겨 들었다, 한 손에 세 개씩 더그녀의 짐을 뺏어 들었다. 뒤돌아 보지 않아도 당황해 하는 그녀의 기색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저기하고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요 주세요. 가야 할, 꽤 먼 거리가 남았으므로 나는 걸음의 속도를 높이며 큰 소리로 외쳤었다. 여자가 들기엔

 

너무 무거워요. 지나가던 택시와 서쪽으로 흘러가던 구름들그리고 좀더, 흔들리던 길옆의 코스모스며손가락의 통증내딛던 운동화의 감촉과뒤따라 종종 걸어오던 가벼워진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생각난다. 순간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다만 피고 지던 꽃 같은 것해서 사라진 인생의 환() 하나를 새삼스레 떠올리는 기분이다. 그녀도 나도 열아홉 살이었다. 누구에게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시절이 있는 법이다. ”

 

 

착해예뻐로 정의되는(혹은 연봉’, ‘’, ‘’, ‘집안’, ‘전문직으로 정의되는) 피상적인 남녀 관계들에 싫증이 난 모든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게다가 반전까지 있다. 마음의 준비를 약간 하고 밤을 새서 한번에 읽는 것이 더 좋을 듯.


덧글

  • chokey 2010/11/15 02:23 #

    어쩔수 없이 밤을 새서 한번에 읽게 만드는 책이었던 것 같아요. 아- 저는 막판에 가서는 뭔가 슬퍼져서 울게만 되더라구요..
  • 미카 2010/11/15 19:36 #

    저도 마지막에 충격을 좀 받았어요.
    박민규씨가 이렇게 아련한 소설을 쓰실 줄이야...이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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