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시간 : 2011/01/01 15:14
- 퍼머링크 : annalee.egloos.com/2735698
- 카테고리 : book talk

좀 유명한 블로거다 싶으면 꼭 있는 음식 관련 포스팅. 또 맛집만을 다루는 블로그들도 차고 넘친다. 하다못해 동네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가장 기본적인 샐러드를 주문해도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경우가 많고.
그러나 나는 그런 포스팅을 유심히 살펴본 적은 없다. 남이 뭘 먹는지, 먹기 전에 뭘 하는지, 먹은 후에 또 뭘 하는지 당최 알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아주 독특한 요리일 경우에는 또 다르지만. 또 누군가 그러는데, 레스토랑에서 DSLR을 꺼내 놓는 순간 음식의 질이 달라진다며 카메라가 있을 때와 없을 때가 차이가 극명하다는 말을 들은 이후에는 인터넷 상의 맛집과 그들을 찬양하는 블로그의 포스팅에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맛집 소개하는 수많은 티비 프로그램은 물론이거니와. 적어도 인터넷과 티비의 추천으로 뭘 먹으러 가본 적이 없다.
그렇다해도 나는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맛있는 음식에 담긴 이야기나(누들 로드 같은 다큐라던지), 우리가 볼 수 없는 숨겨진 키친에서의 크고 작은 비화들이나, 제이미가 정신없이 요리하는 광경이라던가에는 마음을 뺏길 수 밖에 없다. 그 와중에 한 에디터의 추천으로 읽게 된 [Heat]라는 책은 맛집 설명과 달콤하다못해 못 견딜 정도의 요리 설명에 절대 만족하지 못하는 그냥 나같이 맛집 순례보다는 요리와 요리사 그 자체에 궁금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두고두고 읽을 만한 요리 관련 서적일 것이다.
책의 저자인 빌 버포드는 8년 동안 '뉴요커'지에서 문학 담당 기자로 일했고, 현재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글쟁이다. 중년의 나이가 된 그가 뉴욕에서 대단히 성공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인 'BABBO'에서 마리오 바탈리라는 걸출한 요리사의 노예(!)로 들어가며 겪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 바로 [Heat] 그런데 이 빌 아저씨는 겁도 없이 뉴욕에서만 머물지 않고 마리오가 일했던 이탈리아의 한 레스토랑으로 찾아가 파스타 등의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고, 또 푸주한이 되기 위해 투스카니 지방에 찾아가 고기에 대해 배운다.
우연히 알게 된 마리오라는 요리사 때문에 평범한 중년 남자였던 빌은 한 사람의 뛰어난 요리사로 변모해가고, 이 과정을 엄청나게 유머러스하게 담고 있는 [Heat]를 읽고 나면 요리와 요리사, 외식산업계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음식 관련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놓치지 않고 읽어야 할 정도로 뛰어나고 유쾌한 책.
책의 처음부터 그의 글은 반짝반짝 했지만, 본격적으로 눈도 떼지 못하고 읽기 시작한 부분을 공유하고 싶어 본문의 일부분을 발췌함.
…재료 준비팀은 이를 테면 주방의 신경 훈련소였다. 요리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기본기, 그 중에서도 칼 다루는 기술을 배운 처음 몇 주 동안은 그런 느낌이 특히 강했다. 여태까지는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면서 칼을 다뤄온 것 같았다. 첫날에 내 칼, 그러니까 엘리자에게서 빌린 칼을 갈려고 일을 잠시 멈췄더니 엘리자도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내 동작이 거꾸로였기 때문이다. 칼질에도 문제가 있었다, 재료를 썰 땐 칼 끝을 도마에 고정시키고 칼날을 앞뒤로 움직이면 힘들이지 않고 미끄러지듯 재료를 썰 수 있고, 칼을 다루기도 한결 수월했다. 요리 좀 한다는 사람들은 이걸 다 알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통 몰랐다.
성가신 기술도 있었다. 당근은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 오래도록 끓이는 육수에는 셀러리, 양파, 허브, 그리고 당근이 들어갔다. 이런 것들이 육수를 부드럽게 해준다. 이건 나도 알고 있었다. 아무튼 안다고 생각했었다. 집에서도 육수를 끓여봤으니까. 수프, 닭고기 스톡, 뭐 그런 것들. 그럴 때 나는 당근을 그냥 던져 넣었다. 썰어서 넣기도 했지만 아닐 때도 있었다. 몇 시간이나 끓일 건데 무슨 상관이람. 하지만 땡! 틀렸다.
당근을 준비하는 데에는 단 두 가지 방법만 있는 듯했다. 대충썰기와 작은 깍뚝썰기. 대충썰기는 당근을 길게 2등분한 다음-탁,탁,탁,- 완벽하게 똑 같은 반달 모양으로 써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전혀 대충 써는 게 아니었다.
악몽은 작은 깍뚝썰기였다. 당근을 꽁다리까지 남김없이 1밀리미터 정육면체로 썰어야 했다. 당근이란 것이 정육면체 모양으로 생겨먹지 않았으니 우선 기다란 직사각형으로 다듬고, 그걸 얇은 1밀리미터 두께로 저며서, 다시 1밀리미터로 길게 자르고, 탁탁탁 썰면 1밀리미터 정육면체가 나온다. 처음 한 통은 거의 제대로 한 듯했다. 아니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다른 사람들이 급히 서두르는 나머지 내가 만든 기하학적 모양새를 아무도 꼼꼼히 살피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엘리자가 불쑥 나타나서 내가 재료를 엉망으로 망치고 있지 않나 확인하는 게 보통인데, 당근은 잘할 거라고 믿었는지-하긴 당근 가지고 뭘 어쩌겠어?- 거의 끝날 무렵에야 나타났다. 그러곤 보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작은 깍뚝썰기라고 했잖아요! 이게 작아요? 이게 뭔지는 몰라도 아무튼 틀렸어요!” 두 시간 동안 썬 당근이 전부 버려졌다. 그 정도로 엉망이었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사건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기까지 사흘이 걸렸고{“그 여자가 내 당근을 버렸어. 전부 다!”, 그때까지도 분한 마음에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당근을 제대로 써는 데 성공한 건 한달 후였다. 비록 그 성취감(“와!” 엘리자는 4쿼트 용기를 들어 국통에 쏟으며 말했다. “이건 괜찮네요”)이 내가 시시때때로 불완전한 것들을 몰래몰래 집어먹었다는 사실에 훼손되긴 했어도.
라구에 쓸 돼지고기를 썰고(첫 통은 되돌아왔다. “이건 덩어리잖아요. 정육면체라고 말했을 텐데!”), 소 옆구리 살에서 비계를 잘라내는 법을 배웠다. 허리 살 묶는 법을 배웠을 땐 어찌나 흥분이 됐던지 집에 가서도 연습을 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엘리자에게 말했다. “모든 걸 묶었어요. 양 다리, 식기, 의자, 퇴근한 아내까지 묶었다니까요.” 엘리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철 좀 드세요.” 그리곤 하던 일을 계속했다.
주방에서는 냄새에 사로잡히게 된다. 오전이 절반쯤 지나갈 때면 준비가 거의 끝나 빠른 속도로 척척척 음식이 만들어지고, 이런저런 냄새가 파도처럼, 또는 음악처럼 흐르며 스며들었다. 고기 냄새가 풍기면 주방은 겨울 양의 깊고 질척한 냄새에 뒤덮인다. 몇 분이 지나면 쇠 주발에서 초콜릿 녹이는 냄새가 난다. 그러다 느닷없이 내장처럼 속을 뒤집어놓는 냄새가 퍼지고(코끝을 간질이는 초콜릿과 내장 끓이는 냄새 사이의 분열감은 흥미롭다), 뭔가 잘 익은 해산물(뜨거운 통 속에서 푹푹 삶는 문어), 조금 짓무른 듯한 파인애플 냄새가 뒤를 잇는다. 그렇게 차례차례 월귤나무, 닭고기 육수, 그리고 어디서 볼로냐 라구를 준비하는지 쇠고기와 돼지고기와 우유가 뒤섞여 마음이 훈훈해지는 냄새가 난다.
그때까지는 책에서 읽은 것이 내 요리 인생의 토대였다. 나는 집에서도 늘 간단하게 해 먹는 식사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고 싶었다. 비록 그 요리라는 것이, 특히 친구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만들 때는, 열의와 미숙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특징으로 인해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긴 했지만. 친구들은 얼마쯤 늦게 도착해야 하는지를 미리 계산해서 나타났다. 시간 계산을 잘못하면 어떤 광경을 목격해야 하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주인이라는 인간이 요리를 옷으로 했는지 온통 얼룩이 진 채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 친구고 뭐고 다 사라져주길 바라는 광경. 한번은 불이 났을 때 사람들이 도착했다. 큰불은 아니었다. 주방에서는 검은 구름이 피어나고 혼이 빠진 나는 기름에 붙은 불을 어떻게 꺼야 하는지 우왕좌왕하다 문을 열었다.
전문 주방에선 일을 해본 적이 없고, 그런 사람들을 늘 우러러봤다. 그들은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사람들 틈에 들어와 있었다. 일단 기본기를 익히고 나자 더 이상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됐다. 나는 주방의 일원이 됐고, 이 폐쇄된 뒤쪽 공간의 도마 위에서 움직이는 칼의 리듬 속엔 내 칼도 섞여 있었다. 여긴 창문이 없고, 자연광이라곤 한 줄기도 스며들지 않았으며, 외부와의 연결도 끊어진 곳이었다. 바깥 날씨는 짐작도 할 수 없고, 전화가 한 대 있기는 하지만 그 번호는 어디에도 실려 있지 않았다. 밖으로 연락은 할 수 없어도 축제의 음식을 준비하는 이 과밀한 공간에 들어와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최근 덧글